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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 일본 음악, 힙합 문화, 뉴노멀 시대 음악 전망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의 음악의 흐름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의 음악의 흐름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의 음악의 흐름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의 음악의 흐름

프랑스의 인상파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눈에 비친 느낌, 인상을 중요시하는, 즉 실제 로거기에 있었던 풍경이라든가 물건의 형체나 색 따위가 아니라, 화가에게 준 인상을 느낀 그대로 표현한 그림이다. 마네나 모네, 르느와르, 고호, 고갱, 세잔느 등의 화가가 이러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위에 열거한 모네는 그러한 수법으로 그림을 그린 대표적 화가다. 모네는 마음속에서 느낀 인상을 「색」의 모임으로 표현했다. 이 「색」은 그저 무턱대고 그린 것이 아니다. 「색」이 모였을 때의 효과를 충분히 생각하고 계산해서 하나하나의 「색채의 점」을 정성껏 그렸던 것이다. 인상주의 음악도 대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바그너나 말러의 음악이 규모를 크게 확대시키는 쪽으로 새 음악을 만들었던 것에 비해 인상주의 음악은「음」을 「색채의 점」으로 생각, 개개의 음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정성껏 계산함으로써 마음에 비친 델리케이트 한 인상을 듣는 이에게 전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때까지의 형식이나 작곡기법에 구애되지 않고 특수한 화음 변화를 통해서 색채적인 음향을 만들어냈다. 악기 편성면에서도 그러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 하프를 첨가한 트롬본에 굳이 약음기를 달라는 지시를 하는 등 특별한 기법이 강구되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음악을 쓴 대표적 인물이 바로 드뷔시이다.

원시주의와 신고전주의

난폭한 터치, 불타오르는 듯한 색채. 이것은 마티스를 중심으로 한 포비즘 화가들의 생명감 넘치는 회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음악의 세계에서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원시주의(原始主義) 방식이 바로 그것으로서 그 대표자 스트라빈스키는 이 원시주의 방식을 발레음악으로서 수용했다. 그는 색채적인 오케스트라의 울림, 민족음악에서 따 온 강렬한 리듬, 이것들을 멋있는 색채의 무대미술과 격렬한 인간 육체의 움직임에 결부시킴으로써 원시적인 생명감을 보다 한층 더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대표작 「봄의 제전」이 작곡된 것은 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주도하는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 대표들에 의한 정부가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제국주의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변신했다. 이러한 새로운 러시아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판단한 슽츠라빈스키는 고향을 떠날 결의를 굳혔다. 제1차 대전이 끝난 1918년에 스트라빈스키는 또 다른 발레음악을 썼는데 그 작풍(作風)이 전과는 너무도 달라서 사람들은 마치 카멜레온 같다고 놀라워했다. 「병사의 이야기」라는 이 발레의 무대 음악에는 이미 대오 케스트라는 사용되지 않는다. 음악의 표현방식도 고전적인 간소한 방식을 쓰고 있다. 단순하긴 하지만 재즈 수법을 도입했던 이 음악은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음악으로 호칭되고 있는데 이 음악에서 우리는 현대음악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12음 주의와 신비주의

20세기의 복잡한 인간 사상을 음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조성(調性)」에 묶여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조(調)」의 중 심음인 주음(主音)을 구별할 수 없는 음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12 음주의(音主義)의 음악이다. 이것은 오스트리아의 쇤베르크에 의해 제창되고, 그 제자인 베베른과 밤베르크 등이 그것을 이어받아 완성시켰다. 쇤베르크는 유태인이었으므로 그 후 나치의 박해를 받아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기도 중에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 기쁨을 음으로 표현하려고 한 음악도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神秘主義) 음악이다. 이들은 「신비 화음(神秘和音)」이라는 독특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이것을 사용해서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신비감을 맛보게 하기 위 해음과 함께 색채를 말하는 건반악기(이것은 헤밍 톤이라는 사람이 발명했다)를 이용해서 스크린 위에 색채의 영상을 반영하려고까지 시도했었다. 심지어는 향기와 맛을 내포한 신비극까지 계획했지만, 이것은 완성에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민족주의 음악

1934년, 신생 소련에서는 제1회 문학자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고르키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함으로써 「현실을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진실로, 또 역사적 구체성을 그리는 것을 예술로 요구한다」고 하는 규약이 채택되었다. 이 방침에 따라 음악도 「대중에게 알기 쉽도록」 만들어져야만 했다. 그것도 오페라나 칸타 타처 럼 구체적인 내용면에서 국가의 정치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 대신에 정부는 그들의 음악작품을 사주는 제도를 신설했다. 프로코피에프의 오페라 「전쟁 와 평화」, 쇼스타코비치의 「숲의 노래」등은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로부터 소련의 음악은 유럽의 현대음악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헝가리나 루마니아에는 많은 민요가 있다. 그래서 음악가들은 그 민요를 소재로 해서 향기 높은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인 바르톡 와 코다이는 이들 지방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소박한 음악을 녹음했으며 그것들을 연구, 편곡해서 자기들의 개성이나 예술성을 첨가하면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냈다. 이외에도 스페인의 팔랴, 스위스 태생의 유태인인 블로흐 등이 그와 같은 음악활동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