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중 음악, 일본 음악, 힙합 문화, 뉴노멀 시대 음악 전망

고전파 시대의 소나타 형식 음악의 등장

고전파 시대의 소나타 형식 음악의 등장

고전파 시대의 소나타 형식 음악의 등장
고전파 시대의 소나타 형식 음악의 등장

음악을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문장으로 정리하는 완성 방식, 약속 말, 그런 것이 이 시대에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 최대의 것이 「소나타 형식」이다. 여기에서 발전한 「교향곡」이라든가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의 「현악 4중주」나 「피아노 소나타」 같은 악곡 형식도 이 시대에 완성되었다.

화성(和聲) 음악

전시대 즉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였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음악과 화성 음악시대를 대표하는 모차르트 음악의 아름다움을 비교해 보자. 바흐의 피아노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음악을 들어 보면 곧 알 수 있겠지만 바흐가 음악을 작곡하는 방식은 몹시 엄격한 법칙 하에서 규칙적인 반복음을 거듭하고 있다. 또 서로 대립하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선율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그 특징이다. 이런 음악이 폴리포니 음악, 즉 다성 음악이며 이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에 반해 모차르트의 방식은 어떤가? 단순하고 명쾌한 선율이 진행돼 가면, 그 하나하나의 음에 조화되도록 화음이 뒷받침해준다. 이런 음악을 다성 음악에 대해 「화성 음악」이라 부른다. 또 제1주제와 제2주제로, 2개의 성격이 다른 주제를 사용, 이것들을 작곡가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전개하고, 마지막에 주제가 다시 한번 반복되도록 구성하고 있다. 이것이「소나타 형식」이다. 이 형식에는 자유를 추구하는 이 시대의 숨결이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소나타 형식」이 현대에 있어서도 뛰어난 음악형식이 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이다.

궁정은 소나타 형식을 키운 온상

현재까지도 최고의 음악형식으로 지칭되고 있는 「소나타 형식」은 이 고전파 시대에 완성되었다. 그것을 완성한 것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등 이 시대의 음악가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하고 있던 궁정이 음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라도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궁정은 음악을 키운 온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를린(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본인이 플루트의 명수로서 작곡도 했다. 또 빈(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여제(女帝)도 아름다운 소프라노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또 이 시대는 계몽주의라고 해서 인간들이 지금까지의 낡은 인습이나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개인으로서의 자각에 눈떠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고방식이 유행했었고, 왕후들도 앞장서서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었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다 뛰어난 음악을 - 그러한 요구가 각지의 궁정 안에 있는 음악가들을 끊임없이 자극했으며 그에 따라 작곡 공부나 오케스트라의 기술 등이 보다 중요해졌다. 당시 음악의 온상지였던 대표적인 궁정으로는 산스 시궁, 만하임 궁, 그리고 에스테르하지 궁을 들 수 있는데 산스 시궁은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가까운 포츠담시에 다베르 사이 유 궁전을 모방해서 만든 궁전이다. 설계는 모두 왕 자신이 손수 한 것이라고 하는데 독일의 로코코 건축의 가장 뛰어난 건축물이다. 여기에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아들로서 「베를린의 바흐」라고 불리던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봉직하고 있었다. 이 바흐는 청년시대부터 근 30년간 이 궁정에서 일을 했으며 특히 소나타 형식 확립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또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칼 테오도르라는 왕도 열렬한 음악 애호가였다. 그 궁정이었던 만하임에는 각지의 유명한 음악가가 모여 유럽 제일의 뛰어난 오케스트라를 갖출 수 있었다. 이들은「만하임악파」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음악을 많이 남겼다. 그들은 엄격한 연습에 의한 새로운 연주법의 개발, 4악장 형식의 음악이나 제1주제와 제2주제의 대립적 표현 등, 소나타 형식을 완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 헝가리 귀족인 에스테르하지 후(侯)는 음악을 위해서는 아무리 많은 경비라도 아까와하지 않는 음악 애호가였다. 하이든은 29세 때부터 30년간이나 이 귀족의 궁정 악장직을 역임했다. 이 동안에 그는 뛰어난 악단을 마음대로 지휘하면서 수백 곡의 교향곡을 비롯, 현악 4 중주곡과 피아노 소나타 등 수많은 곡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같은 작곡 활동 속에서 소나타 형식의 완성이라는 대사업을 완수하게 된 것도 에스테르하지가에서의 혜택 받은 환경 덕택이었다.

궁정에서 시민에게로 옮겨지는 음악

지배계급의 힘이 약화되고 상공업의 발달 등으로 힘을 얻은 시민계급이 사회 표면에 등장하면서 음악을 즐기는 방식도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교회나 궁정에 독점되었던 음악가의 음악이 시민들 사이에서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빈을 비롯해서 당시 대도시에서 공개 연주회가 열리게 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궁정 축제용으로 만들어졌던 오페라도 시민을 대상으로 하게 되면서부터 격식이 엄했던 것에서 인간미가 있고 유머가 넘치는 것으로 변모되어갔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이상형을 마음속에 지닌 채 시립 민중극장을 짓게 해서 음악이나 연극을 생활의 일부로 즐기게 되었다. 음악가가 궁정이나 귀족들의 보호에서 벗어나 청중인 시민을 대상으로 한 직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또 악보를 음악출판사에서 출판하고 공개 연주회를 기획․주최해서 수입의 길을 강구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