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힙합의 역사(힙합이 주류로 재탄생한 이유)
1992~95년 무렵은 LA의 갱스터랩이 팝 차트를 휩쓸던 시기였습니다. 갱스터랩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함께 향락적이고 과장된 허세를 뽐내는 양면적 형식의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 무법자적이면서도 향락적인 태도는 게토의 흑인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갱스터가 되어서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어 주류 사회에 시비를 걸면서 복수의 쾌감을 얻을 수 있었죠. 이런 태도로 갱스터랩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태도가 지속할수록 범죄와 폭력에 연루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갱스터랩의 사양길을 재촉하게 됩니다. 갱스터 래퍼의 역경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투팍인데요. 투팍은 25세라는 짧고 굵은 삶을 극적으로 마감한 거리의 영웅으로 불리면서 현재까지도 거대한 팬덤이 무너지지 않고 있습니다. 1970년대 뉴욕 브룽크스에서 자생한 힙합이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을 이어가다가 1990년대 주류 음악 씬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 대중음악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흐름을 볼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흑인 청년들의 비주류 음악이었던 힙합이 오늘날 전 세계 대중음악의 주류로 재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힙합이 주류로 재탄생한 이유
가난한 동네의 청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놀이문화이자 단순한 댄스와 파티 음악에 불과했던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직이 어떻게 자생적으로 전 세계의 주류 음악으로 잡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할 때 90년대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갱스터 래퍼였던 투팍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인물입니다. 한국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많은 청년 래퍼들이 하나 같이 힙합과 우연한 만남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고 증언할 때 거론되는 아티스트가 바로 투팍이기도 한데요. 힙합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에 두 장의 다이아몬드 앨범을 달성한 투팍은 1996년 25세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미국 힙합 신을 대표하는 최고의 랩퍼로 손꼽히고 있는 만큼 그의 음악적 파급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래퍼의 역량을 가늠하는 것은 무엇보다 가사의 질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아프로 아메리칸의 대물림되는 지독한 가난과 흑인 하층민의 엄혹한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밀도 있게 접목시켜 간 그의 시적인 가사는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릴 만큼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로 확대되면서 많은 청년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등 그의 랩 작사 실력은 역대 최고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1992년에 개봉한 제프 폴락 감독의 농구 영화 한 편이 있는데요. 제목은 Above the Rim이라는 제목인데요. 한국에서는 할렘 덩크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투팍은 마약상 'Lucky' 역으로 출연했는데요. 배우 활동을 시작했던 투팍은 욕설과 독설로 가득한 서부 힙합 최고의 갱스터 래퍼로 훨씬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그가 쓴 시들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투팍은 흑인 청년들의 거칠고 난폭한 행위에 대해서 정당한 이해와 공감을 표하면서도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또 쓰레기와도 같은 게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깨어있어야 할 것을 당부하는 가사를 통해서 흑인 청년들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단순한 파티 음악으로 시작된 힙합 뮤직에서 사회의 억압과 차별 속에서 간신히 생존을 이어갔던 흑인들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대정신을 토해내고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가사에 반영하는 사회운동가의 역할을 했던 투팍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그의 음악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현재까지도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랩 스타일의 역사
가장 먼저 대중적으로 그 존재를 알린 랩 스타일은 공격적인 흑인들의 목소리를 담은 동부의 하드코어 랩이었고요. 그리고 89년 3월 11일부터 랩 싱글 차트가 빌보드지에 신설되면서 랩뮤직이 하나의 대중음악 장르로서 공인받게 됩니다. 하지만 9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하드코어 랩이 퇴조하기 시작했고요. LA를 중심으로 한 갱스터랩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떨치게 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에 처음 등장했을 때 선보인 것도 바로 이 갱스터 랩이었죠?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힙합 뮤직을 들고 한국의 대중음악 씬에 처음 등장했을 때 기성의 평론가들은 댄스와 가사를 메인으로 한 음악은 좀 이상하고 어색하다고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의 비평을 조롱이나 하듯이 데뷔 무대 이튿날부터 팬덤이 형성되는가 싶더니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서태지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면서 현재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서태지의 등장은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만 바꾸어버린 것이 아니라 10대와 20대 청년들을 대중문화의 주체로 호명함으로써 문화 혁명을 선도했다는 데 있죠. 그래서 서태지가 '문화 대통령'으로서 현재까지도 전설로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정작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은 1996년 갑작스러운 은퇴와 함께 불과 4년 만에 끝나버렸습니다. 음악에 파격적인 패션을 도입하고 록 요소는 물론이고 댄스와 발라드, 헤비메탈과 솔까지 다양한 장르의 네트워크로 시너지 효과를 노린 동시에 현란한 믹싱 기법과 주류문화를 공격하면서 소외된 청년들을 대변해 주는 혁신적 가사는 단박에 청년층의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면서 서태지는 시대와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 모든 것을 이루고 있었을 때 서태지는 갓 스무 살에 불과한 청년이었습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록 밴드인 '비틀스' 역시 불과 20대의 청년들이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대중음악계에 수많은 전설과 사건들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만큼 대중음악은 파격성과 창의성을 무기로 삼아 주류문화를 공격하고 소외되고 외로운 청년들을 위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런 면이 바로 주류 음악과 갈등하고 타협을 거쳐서 경합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기존의 주류 음악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리 이상하고 낯선 음악이지만 10대와 20대가 지향하는 음악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으면서 새로운 양식을 창출할 수 있는 점에서 언제나 새롭고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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