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일본의 대중음악 문화
대중음악 분야에서 볼 때 60년대에 일본에서는 미국의 팝 신을 모방한 대중음악이 유행을 끌던 가운데 66년 비틀스가 일본 공연을 하게 된 계기로 영국 리버풀 계 사운드를 모방한 일본 밴드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이른바 일본 그룹사운드의 전성시대가 다가옵니다. 비틀스의 공연은 일본 청년들에게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의 흥분과 새로운 형태의 오락을 제공해 주면서 음악과 패션을 비롯해서 기성의 가치관을 바꾸어버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체제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일본의 청년들은 이런 그룹사운드 붐에 대한 반동으로 지적이면서도 서브컬처의 분위기를 강하게 띈 밥 딜런과 같은 뉴 포크계를 계승한 포크 가수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현재 일본 포크계에서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여성 싱어송라이터 모리타 도지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모리타 도지도
1952년 아오모리에서 출생한 모리타 도지는요, 고등학교 때 도쿄 교육대학의 학생 운동 세력과 교류하게 되면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 이후에 전공투 운동에 가담했던 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72년에 연합적 군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해서 전공투 세력이 완전히 붕괴했던 1975년부터 83년까지 약 9년 정도 활동했던 모리타 도지는요 7장의 앨범과 4장의 싱글을 통해서 대략 50여 곡을 발표하고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에겐 매우 새로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매우 과묵한 데다가 현재까지도 본명을 비롯해서 그녀에 대한 어떤 사생활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에 일본 대중음악계에서는 드물게 신비주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크게 부풀린 긴 웨이브 헤어 스타일에 짙은 색 선글라스, 그리고 항상 어쿠스틱 기타를 등에 메고 있는 모습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데요. 대인기피증을 앓기도 했던 그녀는 대중 앞에서 단 한 번도 선글라스를 벗은 적이 없고요. 또 누구도 모리타 도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모리타 도지의 신비적인 분위기가 보여주듯이 그녀의 노래는 대체로 우울하고 폐쇄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색채를 띱니다. 또 시종일관 외롭고 쓸쓸한 나와 그 어디에도 없는 너, 또는 정처 없이 떠돌고 방황하는 나와 그런 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너 그리고 생의 고독과 허망과 죽음의 감성을 마치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조용히 내뱉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나지막이 읊조리듯이 노래하는 모리타 도지의 쓸쓸한 목소리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피아노 선율 그리고 첼로와 기타 현의 울림이 강약을 반복하면서 슬픔과 비애의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는 그녀의 곡들은 누구나 한번 들으면 저절로 빠져드는 강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의 죽음을 소재로 한 모리타 도지의 데뷔곡인 안녕 내 친구라는 곡은요. 모리타 도지의 친구가 왜 죽었고 또 왜 그녀가 그것을 애달프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느끼게 해 줍니다.
1960~70년대 일본 포크 뮤지션
1960, 70년대에 걸쳐서 대거 출연한 일본 포크 뮤지션들은요, 70대의 나이가 든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인데요. 일본 포크의 신으로 불리면서 일본 포크 가수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역시 2018년 12월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 투어를 개최하면서 관록을 과시했습니다. 오카바야시 노부야스는 일본뿐만 아니라 70년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포크 싱어송라이터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60년대 말 일본 전역에서 벌어진 전공투 운동이 본격화했을 때부터 70년대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면서 학생 운동이 괴멸되었을 때까지 그의 노래는 일본 정부와 기득권층을 향해 신랄한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면서 투쟁가 요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드물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도시시하 대학 신학부를 중퇴한 오카바야시 노부야스는 교회 내부의 부조리를 반발하고 또 정치가의 무능을 조소하는 등 일본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반영한 노래를 만들어서 폭발적인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수많은 곡들이 방송 금지 처분을 받는 등 태생부터 반골 기질을 드러냈던 포크 뮤지션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요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포크 잼보리를 개최하면서 수많은 콘서트 무대에 오르고 또 음반도 다수 발표했지만, 발표하는 곡마다 방송 금지 처분을 받게 되면서 직설적인 사회 비판적 가사를 노래하는 음악 활동에 많은 한계를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무력감은 1975년 국민에게 건전한 가요를 보급하겠다는 의도로 수많은 곡들을 금지하면서 대표적인 한국 정부의 문화 탄압으로 꼽히는 가요 정화 운동을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예를 들면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데뷔곡인 산야 블루스와 또 데뷔 싱글인 쿠소 쿠소 오다는 노래는요, 도쿄 산야 지구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날품팔이꾼들을 소재로 한 노래인데요. 도쿄의 산야 지구가 문제적인 이유는 당시 일본 대학생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히트 만화였던 그리고 일본의 시대정신을 대표한 작품으로 알려졌던 바로 '내일의 조'의 중심 무대가 바로 이 도쿄의 산야 지구였기 때문입니다. 또 70년대에 들어서 학생 운동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는 분위기에서 포크 붐도 잠시 주춤합니다. 연합적 군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이 대중에게 가져다주었던 충격 그리고 60년대 안보 조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반격의 주체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한 분위기에서 대중의 냉소적인 시선도 수면에 떠 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오카바야시로 대표되던 사회 비판적인 포크 뮤직계 노선에 서 있었던 뮤지션들의 공연들이 점점 쇠락해가는 프로테스트 포크의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 정부의 강경한 압력과 거대한 정치권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좌익운동의 무력감과 냉소도 대내외적으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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