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일본의 시대상과 청년 문화
카운터 컬처, 대항문화가 주류였던 일본의 1960년대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의 청년 세대의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카운터 컬처, 이 대항문화가 바로 이 60년대의 지배적인 흐름이었던 냉전과 핵전쟁의 공포 그리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에 대한 어떤 반성과 저항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60년대는 혁명의 시대로 지칭됩니다. 일본의 경우에 그것은 전후 일본 최대의 시민운동이었던 미일 안보 반대 투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맞춰서 전쟁이 끝난 다음에 안보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냉전 이데올로기가 고양되고 있었던 57년에 소련이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게 됩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수상은 소련이 공산주의를 확장하게 될 것을 우려해서 자유주의 세계가 단결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냈습니다. 이것은 곧 미국과 일본이 공동의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지로도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51년에 체결된 안보 조약이 공산주의 위협에 대응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58년에 이르러서 일본의 안보 조약을 전면 개정할 것을 제안하게 되죠. 여기에 양국은 극비리에 교섭을 추진해갑니다. 일본의 방위에 대해 미국의 의무와 개입을 새롭게 추가하고 개정한 곳이 바로 이 60년에 체결된 신안보조약의 핵심이었습니다. 즉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 동맹 관계를 보다 더 강화함으로써 공동방위는 물론이고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을 촉고하기 위해 물적 지원을 미국이 강화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즉 패전국 일본과 점령국 미국의 기묘한 고모 관계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죠. 이런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한 일본 국민은 이 신안보조약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기시노모스케 수상은 안보 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사회당이 국회 본회의장에 못 들어오도록 문을 잠가버린 채 1960년 5월 29일 신안보조약을 기습적으로 체결해버렸습니다. 이렇게 개정된 신안보조약은 196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군사적 동맹 관계의 명분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2020년 1월 18일 미일 안보조약 개정 60년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60년간 두 위대한 국가 사이에 바다처럼 단단한 동맹은 미국과 일본 인도, 태평양 지역, 전 세계의 평화와 안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평가는 바로 이 60년에 제정되었던 신안보조약에 기반을 둔 평가였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본에서는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시민운동이 매일 벌어졌고요. 급기야 시위대가 수상관저를 포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기시 노부스케 수상은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에 총 사퇴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일본의 청년세대 - 전공투 세대
이렇게 60년대 초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일본의 청년 세대를 안보 투쟁 세대라고 부릅니다. 이 안보투쟁 세대 이외에 60년대 일본에는 전공투 세대가 있었는데요. 그래서 이 안보 투쟁 세대와 전공투 세대는 종종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전공투 세대는 발생 배경이 조금 다릅니다. 전공투는 1965년에 결성돼서 도쿄대학의 야스다 강당 사건과 아사마 산장 사건 같은 그런 급진적인 폭력 투쟁을 전개해서 일본 사회 전반이 이 전공투 세대에게 등을 돌리게 되면서 급격하게 퇴보해 버린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고요. 또 안보 세대와 동시대의 청년들이라는 점에서 이 두 세대는 사회적, 문화적인 범주에서는 동시대의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 세대들은요, 패전 이후에 태어나서 6, 7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당시 3종의 신기로 알려졌던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또 3C로 불렸던 자동차, 에어컨, 컬러 TV를 일상에서 누렸던 첫 세대입니다. 또 인스턴트 라면을 먹은 첫 세대이자 신칸센을 타고 도쿄 올림픽을 관람하는 등 일본의 GNP가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 제2위를 차지했던 고도 경제 성장을 경험한 부류였다는 점에서 공통의 문화 감각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이전 세대와 분명히 구별되는 이 세대의 대중운동은 일본 정부 주도의 고도 경제 성장 정책이 낳은 부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이들의 감각이 갖고 있는 특별함이라는 것은 기성 질서와의 충돌을 통해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대중 소비 사회의 움직임을 선도하면서 개인을 둘러싼 일본 사회 전체의 총체적인 이의제기를 처음으로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경제 성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60년대 말에 활약했던 전공투 세대는요. 시민 대중의 영향이 총 집중되었었던 안보 투쟁 때와는 달리 대학생들 중심이었기 때문에 계급투쟁이나 혁명 의식이 대중과 점점 멀어진 시기에 오히려 학원 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활동했습니다. 이런 전공투 세대의 특징은요, 동시대인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함으로써 사회제도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감성적 측면에서의 자유를 모색하는 등 개인의 정체성을 둘러싼 자기 확인의 수단을 찾는데 몰두했습니다.
전공투란 무엇일까요?
이 전공투라는 말은요, 전학 공투 회의의 준말인데요. 일본에 있었던 대학생 운동권 단체들의 연합 조직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서 전학이라는 말은요, 전국 학생이 아니라 학교 전체의 학생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전체 학생 공동 투쟁 회의라는 말은 학생 연대의 모임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1960년대에 일본 사회 내에 여러 대학교들의 단체들이 학교별로 모여서 구성한 학생 운동 조직이기 때문에 이 전학 공투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요. 각 대학별로 전공투가 구성되어 있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도쿄대학과 일본 대학의 전공투였습니다. 동경대 전공투는 대학 해체 또는 자기부정을 슬로건으로 해서 투쟁을 했는데요. 소위 말하는 실력 투쟁으로 가두 폭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전의 학생 시위와는 다르게 과격한 폭력 투쟁을 일삼았던 거죠. 그래서 특정 당파나 정치집단이 자신들의 사상을 내세우는 조직 운동이라기 보다는요 대중운동의 성격이 더 크다고 평가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전공투는 각 학교마다 다른 방식을 보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방식으로 정형화에서 설명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전공투는요, 단일한 조직이라든가 단일한 정파가 있는 모임이 아니라 68~69년 사이에 잠깐 국한된 운동의 흐름을 가리키는 하나의 현상과 같았습니다. 각 대학별로 전공투들을 통일해서 전국 전공투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긴 했지만 결성 대회장을 경찰이 덮쳐서 전공투 간부들이 연행되면서 그 시도는 불발됩니다. 전학 공투 회의에 전학이라는 것은 전국 학생의 줄임말이 아니라 한 학교의 전체 학생 대부분이 참여했다는 의미에서 쓰는 말인 것입니다.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힘이 미치지 못해 쓰러짐은 개의치 않으나 전력을 다하지 않고 좌절하는 것은 거부한다. 이 문구는 굉장히 유명한 문구인데요, 도쿄대에 야스다 강당 벽에 쓰여 있는 글입니다. 일본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타니가와 칸의 글에서 인용했다는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도쿄 야스다 강당 점거 농성 당시에 강당 벽에다가 이 타니가와 칸의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대충 해석하자면 많은 사람과 함께 연대함을 요청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뜻대로 전진할 것을 겁내지 말자 이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중시하고 기성 조직에 의한 통제를 극복하고자 한 조직 원리라든가 행동 원리를 표현한 문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 문구는 정말 전공투 세대에게는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자신에 대한 확신을 동시에 표현한 명문장으로도 평가됩니다. 야스다 강당의 벽에는 그들의 신념이나 이상을 적어놓은 글들이 가득했는데요. 그중에서도 우리는 내일의 조다는 문구가 유명하죠. 이 문구는 당시 최고 인기 만화의 하나였던 츠바테츠야의 내일의 조를 자신들에게 빗댄 말이었습니다. 맞아도 맞아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달려드는 야부키 조를 정부에 항거하는 자신들의 불굴의 의지에 빗대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내일의 조는요, 고아원 출신의 야부키 조가 권투로 성공하는 이야기인데요. 이조는 팔을 내리고 무저항으로 맞다가 한 방의 주먹으로 상대를 쓰러트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상대방을 조롱하듯이 상대의 모진 주먹과 욕설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승리하는 내일의 조를 응원하는 사람 또 조의 주변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의리 있는 하층민들입니다. 츠바테츠야는 하층민들의 캐릭터를 아주 매력적으로 그려놓았는데요. 야부키 조의 역이나 또 조의 적인 상대 선수까지도 굉장히 매력이 흘러넘치는 캐릭터들입니다. 조와 대결을 벌이는 챔피언 리키이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하는데요. 만화에서 이 리키가 시가 죽자 내일의 조의 팬들은 리키가 시 추모 집회를 열 정도였습니다. 거인의 별이라는 작품의 스토리를 썼던 작가 다카모리 이사오와 츠바테츠야의 합작인 이 내일의 조는요. 인물 하나하나에까지 영원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내일의 조가 전공투 학생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이런 민중적인 내용과 함께 불꽃처럼 타오른 당대의 싸우는 인간형을 날카롭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일본의 학생 운동은 다양한 파벌로 나뉘어 분열되고 있었는데요. 그중에서도 테러리즘을 통해서 전 세계의 혁명을 달성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내건 극단적 입장을 가진 파가 연합적군파였습니다. 이 연합적군파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의해서 일본 사회가 이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면서 이 전공투 세력은 완전히 괴멸되었습니다. 이들은 경찰서와 은행을 습격하는 등 도시 게릴라 전술을 꾀하여 무기와 돈을 확보한 뒤에 산속에 들어가서 극단적인 군사 훈련을 하는 가운데 사상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내부 분열을 거듭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요도호 납치사건
1970년 4월 일본도로 무장한 9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일본항공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해서 일본항공의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해서 북한행을 요구했던 일이 있었는데요. 일명 요도호 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항공 납치 사건을 벌이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는데요. 이들은 북한이 좋아서 갔다기보다는 적의 적이기 때문이고 또 가까운 반미 국가이기 때문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게다가 순진하게도 북한에 가서 자기들 방식대로 북한을 좌경화시키고 북한의 적군화를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때 이들이 일본을 떠나면서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우리는 내일의 조다였습니다. 연합적군파는요, 완전한 무장 투쟁파로 거듭났고요. 또 산속의 캠프로 활동 거점을 옮기게 되면서 군사 훈련까지 실시했는데요. 하지만 조직으로서의 구심점이 없었던 데다가 주의나 주장이 다른 조직과의 연합은 극심한 내분을 불러왔고요. 또 결국 71년 겨울과 72년 봄에 걸쳐서 산속의 잠복지에서 12명의 동지들을 참혹하게 살인하는 산악 베이스 사건이 터지고 나서 국내 조직은 점점 약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찰의 추적에 쫓기던 잔당 5명이 가루자와에 있던 아사마 산장에서 열흘간 30명의 사상자를 내게 만든 무장 농성이었던 아사마 산장 사건은요. 일본 방송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쾌거를 올렸던 동시에 또 일본 국내 좌파 운동에 있어서는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적군파의 주력 부대는 괴멸해버렸죠. 이 사건 이후에 연합적군은 해체되었고요. 적군파는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혁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너무 서툴렀고 또 방법도 틀렸다고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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